남한산성이 지닌 역사와 독특한 성의 구조 … 옹성과 벌봉, 그리고 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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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은 조선시대에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을 지키던 남쪽의 방어기지다.

서쪽의 청량산과 북쪽의 연주봉, 동쪽의 망월봉, 벌봉 등을 연결하여 쌓은 대규모 석축산성이다.

이 성은 인조 14년 병자호란(1636년) 때 청나라가 침략해 오자 왕은 이곳으로 피난하여 47일간 항전하였다.

하지만, 왕자들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 나가 치욕적인 항복을 한 장소이기도 하다.

신라 문무왕(661-681, 재위)이 쌓은 주장성(일병 일장산성)의 옛터를 활용하여 몇차례 축조가 있었으나 조선 인조 2년(1624년) 크게 고쳐 쌓은 성이다.

이 성의 둘레는 약 8km이며, 넓이는 28.462㎡로서 성가퀴는 1,700첩이고 4문과 8암문 및 4장대가 있었고 성내에는 관아와 창고, 행궁이 있었다.

남한산성, 남문(지화문)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다. 남문은 남한산성에 있는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에도 출입이 가장 많은 곳이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동문, 남문, 수구문의 세 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 2년(1624년)수축되기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남문은 정조 3년(1779년) 성곽을 보수할 때 개축하며, 지화문(至和門)으로 이름이 붙여졌으며,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 있는 문이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 올 때 바로 이 문을 통해서 들어왔다.

남한산성, 동문(좌익문)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동문은 성의 남동쪽에 위치하며, 남문과 함께 가장 많이 사용했던 성문이다.

조선 선조 때 보수하였고, 인조 2년(1624년)에 다시 건립하였으나, 정조 3년(1779년) 성곽 개축시 함께 보수하였다.

이 때 성문마다 하나씩 이름을 붙였는데, 동문은 좌익문(左翼門)이라 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이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동문이 좌측이 되므로 좌익문이라 한 것이다.

이 동문으 낮은 지대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계단을 쌓고 그 위에 성문을 추조하여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물자의 수송을 수구문 남쪽에 있는 11암문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 서문(우익문)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이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서문은 행궁 우측에 있는 문이라고 해서 붙혀진 우익문(右翼門)이다.

서문은 인조 15년(1637년) 1월 30일 병자호란 때 인조가 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기위해 남한산성을 나가 삼전도와 통하는 길이다.

이 문 앞에 연주봉이 있고 뒷날 이 연주봉에 옹성을 쌓았다. 한강줄기와 연결된 광나루나 송파나루에서 가장 가깝지만, 경사가 급해 우마차 등은 드나 들 수 없었다.

남한산성, 북문(전승문)

성곽 북쪽의 해발 365m 지점에 있는북문은 전승문(戰勝門)이라고 한다.

북문을 나서면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옛날의 창고가 있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 상사창동에 이른다.

조선시대에 수운으로 옮긴 세곡을 등짐으로 이 문을 통해 산성 안으로 운반하였다.

1779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면서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의 전승문이란 이름을 붙였다.

남한산성, 벌봉

암문 밖에서 이 바위를 보면 벌처럼 생겼다하여 벌봉이라 한다.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이 “정기가 서려있는 벌봉을 깨트려야 산성을 함락시킬수 있다”하여 이 바위를 깨트리고 산성을 굴복시켰다는 전설이 있다.

벌봉은 해발 512.2m로 남한산성의 수어장대(497m)보다 높기 때문에 남한산성의 서쪽 내부와 동쪽 성벽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병자호란 당시 이 지역을 청나라 군에 빼앗겨 적이 성 내부의 동태를 쉽게 파악할수 있었으며, 화포로 성안까지 포격할 수 있었다.

남한산성, 연주봉 옹성

옹성은 일반적으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더 둘러쌓은 이중의 성벽을 말한다.

그러나 남한산성의 옹성은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고, 요충지에 대한 거점 확보를 위해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시설물로 다른 성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다. 이 옹성은 북서쪽의 요충지인 연주봉을 확보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연주봉에서 바라보면 아차산 북쪽과 남양주 일대의 한강이 조망되고, 이성산성과 하남시 춘궁동 일대가 특히 잘 보이며, 성 내부의 지역도 관측되는 중요한 요충지이다.

연주봉 옹성의 둘레는 315m이고, 전투 시에 성내로 출입할수 있도록 옹성과 본성 성벽이 만나는 위치에 암문을 설치하였다.

남한산성, 암문

남한산성은 한국 성곽 중에서 가장 많은 16개의 암문이 있다. 암문은 적이 관측하기 어려운 곳에 만든 성루가 없는 성문이다.

원성에 11개,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가 있고 형식은 평거식과 홍예식으로 구분된다.

암문은 은밀하게 식량과 무기를 운반하거나, 원군이나 척후병이 출입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크기가 작고 장식이 없다. 암문의 안쪽에 쌓은 옹벽이나 흙은 유사시에 무너뜨려서 암문을 폐쇄할 수 있게 만들었다.

남한산성, 수어장대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의 누각으로 남한산성에 있던 5개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다.

청량산 정상에 위치하며 성 안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영조 27년(1751년) 2층 누각으로 중건하고 외부에 ‘서장대(西將臺)’, 내부에 무망루(無忘樓)’라고 편액을 설치하였다.

헌종 2년(1836년) 고쳐지으며 외부에 수어장대(守禦將臺) 편액을 달았다.

남한산성, 숭렬전

백제의 시조 온조왕과 인조 때 산성축성 책임자였던 수어사 이서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남한산성 안의 온조왕묘와 관련해서는 실록과 야사의 대부분의 기록에 인조 대에 창건된 것으로 나와 있는데 정확한 연월은 알 수가 없다.

인조 16년(1638년)에 지었으며, 정조 19년(1795년)에 왕이 ‘숭렬전(崇烈殿)’이라 이름을 지었다.

신분이 다른 왕과 신하를 함께 모신 것이 특이한데, 이는 병자호란 당시 인조의 꿈과 관련이 있다.

남한산성, 청량당

남한산성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로서 억울한 모함으로 교수형을 당했던 이회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건립한 사당이라 전해온다.

‘대감당’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남한산성을 청량산으로 불렸던데서 기인하여 공식적으로 ‘청량당’이라고 칭한다.

이회 장군과 그의 처와 첩, 벽암대사의 초상화가 안치되어 있다.

남한산성, 침괘정

무기제작소라 알려져 왔으나 온돌과 마루방, 회랑처럼 된 툇마루 등 건물 구조로 보아 집무실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건립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주변에 있던 무기창고를 명나라 사실 정룡이 ‘총용무고’라 이름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영조 27년(1751년) 광주유수 이기진이 고쳐 짓고 ‘枕戈亭(침과정)’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이를 ‘침괘정’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명확하지 않다.

무기 제작소와 무기창고는 침괘정 부근에 별도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 현절사

병자호란 때 적에게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했던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삼학사의 우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청나라에 강제로 끌려가 곤욕 끝에 참형을 당한 삼학사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숙종 14년(1688년) 유수 이세백의 주도로 세워졌다.

후에 삼학사와 함께 항복하기를 거부한 김상현, 정온의 위패도 함께 모셔졌다.

죽어서도 임금을 향한 강직한 선비정신의 상징적 건물로 여겨진다.

남한산성, 연무관

군사들의 훈련을 위하여 건립한 곳으로 인조 3년(1625년) 남하난상을 쌓을 때 함께 지어졌다.

연무관은 규모가 크고 육중하며 높은 기단 위에 자리잡고 있어 멀리서도 그 자태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건물 내부 가운데에 있는 대들보에는 전,후면에 용을 그렸고, 측면쪽 대들보에는 봉황을 그려 넣은 것이 특이하다.

남한산성, 지수당

현종 13년(1672년) 때 부윤 이세화가 건립한 정자로 당시에는 정자를 중심으로 앞뒤에 3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개만 남아 있다.

정자의 동쪽에는 부윤 이세화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고, 제 3연못지로 추정되는 지역은 현재 방으로 바뀌어 있다.